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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의식의 세계

첨단이론연구소, 데이비드 R. 호킨스

by 에레아나 2014.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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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혁명 Power VS Force by David Hawkins

 

 

 


 

 

물고기 떼가 500미터 전방에서도 보이지 않는 적들을 감지하고 방향을 바꾸듯이,  우리 인간에게도 선악을 판단하는 무의식의 본능이 주어져 있다고 한다.

 

사람 몸에 좋은 영양물질의 자극은 근육의 힘이 증가하는 반면, 인체에 해로운 물질의 자극은 근육의 반응이 현저히 약해진다는 사실을 20세기 후반,  미국 조지 굿하트 박사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하고 이를 운동역학이라 명했다.

육체는 물질적인 자극뿐 아니라 감정적이고 지적인 자극에도  근육이 강화되거나 약화된다는 사실을 1970년대 다이아몬드 박사는 <당신의 육체는 거짓말을 모른다>라는 저서에서 발표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시험 결과는 충분히 보편성을 띄고 있었고 거듭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가 없었다.

 

호킨스 박사는 20 동안의 연구 소견으로 첨단 과학에 비추어 보아도 성인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아, 眞我, 또는 실체의 본질을 확인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비전은 영혼과 이성을 깨우쳐 주는 무한한 힘을 가진 우주와 인간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운동역학은 공인된 과학으로 자극에 대한 근육의 반응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긍정적인 자극은 근육에 강한 반응을 초래하고 부정적인 자극은 현저히 약한 반응을 가져온다. 이러한 긍정적, 부정적 반응이 물리적 자극뿐만 아니라 정신적 자극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분할 아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진실과 거짓까지도 구분할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시험은 과학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며, 어느 누가 실시해도 충분한 정당성이 있다고 믿는다. 시험을 통해 인간의 의식 레벨을 수치화시킬 있으므로 사람들의 견해나 진술, 또는 관념 들의 진실성과 의식 수준의 모든 영역을 대수(對數)로써 1부터 1000까지의 수치로 측정할 있다.

 

측정치는 첨단 이론 물리학이나 혼돈 이론의 비선형 동역학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검증되었다.

 

책의 연구 결과는 20여년 동안 수천 명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여러 연구팀에 의해 진행된 백만번의 시험 결과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탐구가 영적 성장을 이룩하고 의식의 진화된 차원에 이르는 데에 보탬이 되고, 나아가 깨달음에 까지 이를 있는 바람직한 길잡이가 있다는 것이다.

 

 

 

본론

 

 

인간 행동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간 행동이 아직도 판독이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 뿐으로 어떠한 원인도 찾을 없다. 하지만 진실한 해답은 언제나 단순한 곳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육체는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미묘한 차이를 멋지게 분별할 있다.

 

 

시험방법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은 피험자로서, 팔을 바닥과 수평으로 유지하며 옆으로 올린다. 시험자는 손가락으로 올려진 팔의 손목을 누르며 '저항하라' 말한다.

 

이것이 시험의 전부이다.

 

시험자와 피시험자는 서로 말할 있다. 피시험자가 시험자의 질문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피험자의 팔의 힘이 시험자의 누르는 힘에 의해 측정된다.

 

시험 중에는 개인의 감정이나 다른 생각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험자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하면 시험의 정확성이 높아지며 배경 음악이 있어서는 안된다.

 

시험이 너무나 간단하므로, 시험자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반대 질문을 함으로써 재확인해 있고, 모두가 믿을 만한 결과를 얻을 때까지 다방면으로 시험해 있다.

 

시험의 정확성을 위하여 가지 주의할 점은 안경은 벗어야 하고 모자도 벗어야 한다. 보석이나 수정시계, 동전 모든 쇠붙이 물품은 제거되어야 한다.

 

피험자들의 다양한 태도, 생각, 느낌, 상황, 인간관계 등의 상대적인 강도를 대수의 수치로 측정할 있다.

 

피험자들에게 나타난 수치는 단지 육체의 존재 상태일 뿐인 1에서부터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의 정점이라 600 이르기까지, 나아가서는 깨달음의 상태인 1000까지 분포되어 있다.

 

의식의 여러 층들은 언제나 복합되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삶의 조건 속에서는 이런 의식 수준이었던 사람이 다른 조건을 만나면 전혀 다른 의식 수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총체적인 의식 수준은 이처럼 다양한 여러 수준들을 합산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의식의 지도를 들여다보고 명상을 함으로써 '기쁨' 단계에 이르는 보다 빠른 길을 발견하기를 기대해 본다.

 

 

의식의 지도

 

수치

수준

신의관점

세속관점

감정

과정

1000

깨달음

자애

존재

언어이전

순수의식

600

평화

항상 존재

완전한

축복

자각

540

기쁨

하나

전부 갖춘

고요함

거룩함

500

사랑

사랑

자비로운

존경

계시

400

이성

현명함

의미있는

이해

추상

350

포용

인정많은

화목한

용서

초월

310

자발성

감화주는

희망에

낙관

의향

250

중용

능력있는

만족한

신뢰

해방

200

용기

용납하는

가능한

긍정

힘을 주는

175

자존심

무관심한

요구많은

경멸

과장

150

분노

복수에

적대한

미움

공격

125

욕망

부정하는

실망하는

갈망

구속

100

두려움

징벌의

무서운

근심

물러남

75

슬픔

경멸의

비극의

후회

낙담

50

무기력

비난하는

절망의

절망

포기

30

죄의식

원한 품은

사악한

비난

파괴

20

수치심

멸시하는

수치심

굴욕

제거

 

 

의식지도로 인해 역사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도 새로운 조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가장 괄목한 점은 눈에 보이는 힘과 인간에게 내재된 진실한 힘을 구분할 있었다는 데에 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만 의식의 향상을 꾀할 있는가에 대해서 항상 가르침을 펼쳐 왔다. 사다리를 오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스승이 없이는 영적 성숙을 기약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적어도 특별한 가르침을 받거나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기쁨으로 가는 열쇠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게 조건 없이 친절을 베풀고 자비심을 갖는데 있다. 이러한 자비심이 없다면 인간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세계 인구의 에너지 수준에 대한 분포도를 그림으로 그리면 흡사 뾰족탑을 연상 시킨다. 인구의 85% 분기점인 200이하에 속하며, 인류 전체의 평균 의식 수준은 오늘날 204 도달해 있음을 있다. 지붕 꼭대기의 비교적 소수의 강력한 힘이 바닥에 깔린 사람들의 약한 에너지를 상쇄함으로써 204 평균치를 얻게 하고 있다.

 

오로지 0.4% 인구가 500 혹은 이상의 에너지 장으로 측정되며, 1000만명 명만이 600 이상의 수준에 도달한다.

 

운동역학 시험 결과는 단지 인구의 2.6% 잘못된 사람들이 72% 해당하는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언뜻 보기엔 뭔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들기 쉽지만 세상살이의 모습을 보면 수긍하게 된다. 아직도 생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지구 도처에는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의식 수준의 진폭은 매우 것이 사실이지만 개인이 생애를 사는 동안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도약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현상이다. 태어났을 측정된 에너지 장은 일생동안 겨우 5 정도의 증가를 보일 뿐이다.

 

세상에 태어날 우리들의 의식 수준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미 심장한 무엇인가를 시사해 준다. 평생 걸쳐도 에너지 장에서 다른 에너지 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잠재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일생에 걸친 내면에 수행으로서만 높은 경지에 오를 있지만,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서도 일시적으로 이런 경지를 맛볼 있다.

 

상이한 의식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동일 대상에 대해 어떻게 의식하고 행동하는지  거리의 '부랑자' 예를 들어보자.

 

대도시의 깨끗하고 화려한 동네에 남루한 옷을 입은 노인이 혼자서 호화 저택의 모퉁이에 기대어 있다. 의식의 여러 수준에서 노인이 어떻게 보는지 생각해 보자.

의식 수준의 밑바닥인 20(수치심) 영역에서는 그를 더럽고 구역질 나며 창피한 존재로 생각한다. 30(죄의식) 수준에서 사람들은 그의 상황을 비난한다. 그가 그런 처지에 빠진 것은 당연하다. 복지 혜택을 이용하기 위한 파렴치한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50(절망) 수준에서는 그를 자포자기 상태로 보고, 사회가 없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는 단적인 예로 본다. 75(슬픔) 수준에서는 그를 비극적이고 친구하나 없는 고독한 사람으로 본다. 100(두려움) 수준에서는 그를 위협적인 존재, 혹은 사회악으로 있다. 그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경찰을 불러야 된다고 생각한다. 125(욕망) 수준에서는 그를 골칫거리로 파악하고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지 회의한다. 150(분노) 수준에서는 그에게 폭행을 당할 같은 불안을 느끼지만 어쩔 없는 상황에 대해 분개한다. 175(자만심) 수준에서는 노인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신을 향상시키는 데에 필요한 자존심조차 없는 사람으로 본다.

 

200(용기) 수준에서는 근처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없는지 알아볼 생각이 들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일자리와 거처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250(중용) 수준에서는 노인이 우리를 괴롭히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를 흥미롭게 있다.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하자" 생각이 들며, 그가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310(자발성) 수준에서는 길모퉁이로 데려가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생각이 들고, 지역 봉사단체에 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350(포용) 수준에서는 노인에게 호기심을 갖고 재미있는 얘기가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그가 지금 그런 처지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400(이성) 수준에서는 노인이야말로 최근에 일어나는 경제와 사회 모순의 부산물이며 심리학 연구의 좋은 대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높은 수준에서는 노인이 흥미로운 존재일 아니라 친근하고 신경을 주고 싶은 사람이 된다. 통속적인 사회적으로 장의 범주를 벗어나서 자유를 향한 흔쾌한 노인으로 물질에 대한 무관심에서 오는 평정과 지혜의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보게 된다.

 

600(평화) 수준에서는 노인이 우리들 자신의 잠시 동안의 표현으로 보일 있다.

 

이렇듯 우리의 의식 수준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결정하고 파동적인 관찰자로서 우리가 직면하는 세상을 결정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잠재력과 인식은 손에 손을 맞잡고 있다.

 

우리는 의식 수준을 논의하면서 자존심이 갖고 있는 약점의 하나는 부정성에 있다는 것에 주목한 있다.

의식의 커다란 진전은 '내가 안다' 착각을 버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기꺼이 변화하려는 태도는 흔히 개인들의 믿음이 허물어지고 나아갈 없는 아주 '밑바닥' 처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의식 수준을 높일 있다.

 

 

¡  진실의 추구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종교의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도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파된 가르침의 수준은 가장 높은 차원인 1000이였다.

그러나 2세기경,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실험 수준은 930으로 떨어졌고, 6세기경에는 540으로 하락했다. 11세기 십자군 시대에 와서 수준은 현재의 498 되었다.

아람어로 신약의 람사 번역판은 750에서 측정되었지만, 그리스어로 번역된 제임스 판은 500 머무른다. 여러 번역판에 따라 진실 수준이 다르듯이, 신앙 형태에 따라 진실의 수준도 다양하다.    

 

불교

불교의 원래 가르침은 1000에서 측정되었다. 6세기경 가르침의 실행 수준은 900으로 하락했다. 불교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에 비해 훨씬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

소승불교는 850, 대승블교는 950, 선불교는 600대에서 측정되었다.

 

힌두교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1000으로 측정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준이 떨어져 현대의 힌두교는 850에서 측정되고 있다.

 

이슬람교

마호메트의 의식 수준은 540이었다. 코오란은 570에서 측정된다.

 

 

세계 주요 종교들의 진실 수준이 하락하는 것을 관찰해 보면, 음양의 개념에서 '' 머무르는 종교는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순수하게 남는 반면, 세상사에 깊이 관여하는 '' 종교는 현저한 수준 저하를 나타낸다는 것을 있다.

 

 

모든 아픔과 고통의 원인은 무지에서 생기고, '' 있다면 무지가 바로 죄라고 했다.

 

깨달음에 이르거나 높은 의식 수준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모든 영적 가르침은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왜곡과 오해가 항상 존재할 있다.

성전은 어떤 경우이든지 그에 맞게 인용될 있다. "독선적인" 사람들은 왜곡된 편견과 도덕을 위해서는 난폭함도 괜찮다는 생각 때문에 항상 위험을 내포한다.

 

개인의 의식 수준은 그가 준수하는 원칙들에 의해 결정된다. 의식의 발전을 위해서는 원칙의 예외가 없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개인은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의식은 미세한 에너지의 변화도 분별할 만한 능력이 있다. 이것은 우주에서 의식이 감지할 없는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과 같다. 인간이 사고하는 에너지는 물론 미세하지만 절대적으로 측정된다.

 

100 정도의 수준에서 나오는 생각은 대수 10-7 마이크로와트로 측정된다. 반면 의식수준 500에서 나오는 사랑은 대수 10-3,500 마이크로와트로 측정된다.

 

지구상 인구의 15% 분기점인 200 이상의 의식 수준에 속하지만, 15% 집단적인 힘은 인구의 85% 부정적인 에너지를 상쇄시킨다. 잠재력의 수치가 대수로 증가하기 때문에 의식 수준 1000 아바타르(Avatar,몸을 입은 영적스승) 인구의 부정적 에너지를 상쇄할 있다. 운동역학 시험 결과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700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7,000만명을 상쇄한다.

600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1,000만명을 상쇄한다.

500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75만명을 상쇄한다.

400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40만명을 상쇄한다.

300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9만명을 상쇄한다.

700 12명은 분의 아바타르와 같다.

(현재 지구에는 700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12 존재한다.)

 

이러한 상쇄 작용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부정적 에너지의 혼란으로부터 이미 자멸했을 것이다. 사랑(10-3500 마이크로와트) 두려움(10-7 마이크로와트) 차이는 너무나 커서 인간이 감히 상상할 있는 영역을 벗어난다. 이로써 우리는 하루에 번씩 일어나는 사랑스러운 생각은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상쇄하고도 남음을 있다.

 

육체란 영혼이 표현하는 물질에 지나지 않고, 신체의 변형은 신체의 생을 부여하는 영적 투쟁의 표현이다. '바깥 저곳' 믿음은 '여기 ' 영향을 준다.

 

무지는 공격에 의해 무너지지 않지만, 진실의 표현 앞에서는 빛에 의해 분산되듯이 걷잡을 없이 무너져 내린다. 세상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향상시키는 유익한 방법은 개인의 정직성, 이해, 그리고 긍휼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길밖에 없다. 다양한 인간들이 사실을 인식할 있을 , 인간 사회의 생존과 행복은 보장된다.

 

각자가 그의 생활에서 진실을 추구하게 되면, 잠재력이 처음으로 나타나고 높은 의식 수준의 발판이 되어 주는 분기점인 의식수준 200으로 도약하게 된다.

 

진실을 직면할 있는 용기는 결국 포용의 수준을 초래하며, 이는 벌써 350 수준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이미 여기에는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존재한다. 단계는 결국 사랑의 수준인 500 힘으로 전환된다.

 

우리 자신과 남들의 결점들을 용서가 나타나며 자비심이 따라오게 된다. 자비야 말로 은총으로 향하는 관문, 우리가 누구이고 이곳에 왔는가? 라는 질문의 관문이 되며,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원천이 된다.

 

 

¡  앞으로 나아갈

 

책을 철저하게 소화한다면 독자들은 35 정도의 의식 수준향상을 기대할 있다보통 사람들이 일생동안 겨우 5점의 발전을 한다고 생각하면 35점의 향상은 굉장한 것이다.

 

의식수준의 향상은 개인이 세상에 있는 가장 선물이다. 더구나 선물은 파도의 효과와 마찬가지로 출처로 돌아오게 된다.

 

인류의 의식 수준은 세기 동안 190 머물렀으나 1980년대 중반 갑자기 204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이제 위로 전진할 있는 안전한 발판 위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준다.

 

여러 문제들이 뉴스에서 뻔질나게 다루고 있는 종교의 타락, 범죄의 가중, 어린이들의 폭력, 정치의 비도덕성, 사이비 종교의 이해하기 어려운 난폭함 등이, 거짓이 난무하고 이웃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갖지 못한 우리 사회에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혼동과 마비는 결정을 내릴 있는 도덕의 부족에서 온다. 필자는도덕이라는 어휘에서 옳고 그름을 가르는 도덕적 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속에서 가장 고귀한 행동을 있는  결정과 사고의 기초가 되는 객관적이고 개인적인 토대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주기 바란다.

 

사회 문제는 이처럼 어두운 인간 행동의 와중에서 어떻게 자비심을 발휘하느냐에 있다. 세상은 상대적이라서 개인은 그의 진실의 수준에서 행동하며, 따라서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다. 바로 "옳음" 과격분자들을 위험하게 만든다.

 

영적인 통찰력과 종교성을 내세우는 문헌들을 대할 때에는 흔히 마음 놓기 쉽다. 하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가증스러운 범죄는 신의 이름 아래 행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연구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간은 현재 선악의 분별 능력을 결핍하고 있다는 .

이러한 깨달음에 겸손하게 자신을 맡길 우리는 이미 발전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셈이 된다. 우리는 속기 쉽고 감각에 의해 쉽게 유혹되며 육체적, 지적인 매혹의 환상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분별력을 향한 단계를 밟는다고 있다. 이원적인 세상에서 파괴적인 것을 즉시 알아내어 아직 모르는 마음에 신호를 보낼 있는 의식을 우리는 갖고 있으며, 신호는 해로운 자극이 존재할 육체의 약함으로 나타난다. 지혜란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을 피하는 과정으로 요약될 있다. 밖에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운동역학을 사용하므로서 진실과 허위에 대한 영혼의 어두움은 점차 밝아질 있다. 직관력을 타고난 극소수만이 부정적인 에너지에 의해 해를 입지 않고 깨끗한 삶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최면술과 같이 작용하는 끌개 장에서 오는 손상을 보수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가지 중독에서 회복하는 일에만 사람의 일생이 소모될 수가 있다. 가장 흔하고 만연된 중독은 부정이며, 이것은 이지적인 허영에 의해 우리를 어둠으로 덮는다.

 

지성이란 허위를 있는 능력을 결핍하고 있을 아니라 허위에 대한 분별력이 있다 하더라도 분별력을 견지할 만한 힘이 부족하다.

 

역사를 통해 나타난 지성적인 숙고의 결과 이루어진 수많은 저술들을 보라. 인간에게는 결정적인 분별력과 통찰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심한 것일까?

 

평범한 인간 행위에서는 지성적으로 진실과 허위를 있다고 해도, 지성은 아무래도 부정적 에너지 장의 영향을 저지시킬 있는 힘이 부족하다. 우리의 지성은 될수록 모든 원인들을 상상해 내려고 하지만 인간 고뇌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개인의 지성적으로는 자신의 행동이 자멸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러한 지식 자체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중독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중독을 고칠 있는 힘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에서 천당이나 지옥을 택하며, 결국 자신의 선택의 노예가 된다. 지옥이란 신의 판결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가져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지옥이란 부정적인 에너지의 계속적인 선택과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최종의 결과이다.

 

깨달은 이들은 중생이 하나의 꿈속에 갇혀있다고 묘사해 왔다.

대다수는 보이지 않는 억지의 힘에 의해 밀려, 때문에 많은 시간을 절망 속에서 헤맨다. 우리는 죄를 사하여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고 고백으로 안심을 구한다후회는 인생사에 너무 배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파괴적인 영향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갇힌 사람들에게 구원이란 과연 가능한가?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구원이란 가능한 일이다. 구원이란 사랑의 생각이 부정의 생각보다 사랑의 생각이 부정의 생각보다 훨씬 힘이 크다는 간단한 사실에 보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랑과 기도에 의한 문제 해결은 확실히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 속에 자신을 구원할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면 족하다. 나침반은 단지 , 아니오를 말할 뿐이다. 이것은 천당의 궤도 위에 것에는 강하게, 지옥의 궤도 위에 것에는 약하게 반응한다.

 

좋든 싫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이제 집단적인 깨달음의 진화를 피할 있는 지점에 있다. 무지로 인한 대가를 이제는 이상 수동적으로 치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집단 의식은 새로운 차원으로 뛰어오를 없을 것이다. 이제는 이상 암흑의 노예로 남아 있을 없다.

 

 

¡  산업과 과학분야에 이용

 

운동역학 진단방법이 과학과 산업분야에 응용된다면 발전 속도가 현저히 빨라지고 그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을 있다. 이러한 방법이 얼마나 많은 세월과 돈을 절약할 있을 지는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너무나 분명하다.

 

재료연구

에디슨은 획기적인 백열등을 발명하기 위해 1600 이상의 물질을 대상으로 시험했다. 그러나 방법을 이용하면 가능성 있는 물질들을 편으로 나눈 "적합한 물질은 이편에 속하는가?" , 아니오로 물어 보는 방법으로 질문을 계속함으로써 가장 합당한 물질을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발견할 있을 것이다.

 

제품개발

나비스코사는 연기나지 않는 담배를 만들어 내기 위해 3 5천만 달러를 소비했다.

운동역학 시험으로 앞으로 만들어 내려는 제품의 시장 가능성이나 대중의 호응도 등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1 안에 얻을 있다.

제품이 소비자에게 받아들여지는 상태나 마진의 크고 작음 등을, 시기, 시장, 광고, 소비층 등에 대한 질문으로 정확하게 있는 것이다.

 

과학연구

과학은 운동역학을 마음껏 응용해 있는 분야다.

시험은 열매를 거둘 있는 연구 방법을 신속하게 있으며, 연구의 차원과 범위에 관련된 가장 가치있는 관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알아 있다.

시험은 우리가 이해할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가치있는 사용법은 연구 과정 자체를 확인하여 그것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아내는 있다.

 

신학, 인식학, 철학 분야에서 응용

방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원적인 개념을 초월하고 흔히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평범한 의식 세계를 넘어서는 아주 신빙성 있는 것이다.

대답뿐만 아니라 질문의 진실성도 수치로 측정해 봄으로써 진실의 본질에 대한 혼동을 피할 있다.

 

 

높은 이해의 수준에서는 진실이 있는 것도 평범한 사람에게는 이해될 없는 경우가 있다.

왜곡 현상은 종교의 원칙주의자들 한테서 심각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가르침 중에서 부정적인 것을 항상 강조함으로써 진실과 부정적인 것들을 먼저 내세운다. 질투, 복수, 분노, 죽음의 하느님을 내세움으로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을 지워 버리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부정적인 것을 찬양하고, 자신들의 인간 학대와 잔인성을 합리화시켜 책임을 회피한다.

 

 

¡  생활 속의 응용

 

진실의 수준이나 정직성 정도를 여실히 보여주게 되므로, 진실과 거짓, 건설적인 것과 파괴적인 , 실용적이고 효과있는 것과 비실용적이고 낭비적인 것들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어떤 프로젝트나 개인들의 목표와 동기, 안건 등에 대해서도 감정할 수가 있다.

 

늑대가 양가죽을 뒤집어쓰고 양인 척하는 일이 이상 불가능하게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의식은 진실과 허위의 차이를 뚜렷하게 알고 있다.

 

이것은 당신의 실제 나이를 가지고 시험해 보아도 당장 확인할 있다. 당신의 나이가 43세라고 가정해 보자. 당신이 "나는 43세이다"라고 말한 누군가에게 당신의 뻗은 팔을 누르게 해보라. 당신의 근육 반응은 강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제 "나는 45세이다"라고 말해보라. 그러면 당신의 팔의 반응은 순간적으로 약한 반응을 나타낸다. 마치 컴퓨터처럼, 의식은 단순하게 0 혹은 1, 진실 혹은 거짓이라고 답변해 준다.

 

 

우리는 어떠한 진술이나 믿음 체계, 지식에 대한 진실성의 수준을 알아낼 있다. 문장, 구절, , 전체의 진실성을 정확하게 측정할 있다. 어떤 일에 대해서도 동기나 의식의 수준을 알아낼 있다. 이제 우리는 전에 결코 불가능했던 사회의 흐름과 역사에 대한 유용한 전망을 가질 있게 되었다. 역사를 돌아보고, 스탈린과 링컨을 비교할 있다.

 

운동역학 시험은 감추어진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숨어있는 질서를 계시하고, 만물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방향을 설정할 있게 것이다. 하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면 해답은 다시 다음 질문으로 이어지고, 이렇게 우리는 행복하게도 향상된 길로, 유익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된다.

 

우리의 질문 자체가 우리의 동기나 목적, 인식의 수준을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발견할 있다. 항상 유용하게 쓰이는 것은 대답에 대한 측정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측정이나. 시험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질문의 형식에 대한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말의 정확성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결정이 잘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정확한 의미를 갖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잘되다, 못되다, 좋다, 나쁘다는 생각은 주관적인 것일 뿐이다. 거기에 대한 우주의 '생각' 우리의 생각과는 아주 다를 수도 있다.

 

질문의 동기는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질문을 해도 좋은가?" 묻도록 하라.

 

더욱 일상의 차원으로 내려가서도 시험을 통해 자신의 투자가 안전한 것인지 아닌지, 어떤 기관이 믿을 만한 곳인지 아닌지 등을 결정할 있다.

마케팅 분야만이 아니라 의학 연구나 기계 공학 분야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도 정확히 예측할 있다. 거대한 오일 탱크에 적용시킬 안전예방책에 대해서도 알아볼 있다. 군사 작전의 타당성도 미리 알아볼 있고, 누가 정치를 있는 지도자인지 분별할 수도 있다. 매스컴의 경우에도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나 인터뷰를 받는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지를 당장 있고, 그들이 말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진실인지도 있다.

중고차는 사도 좋은가? 쉽사리 답을 얻을 있다. 세일즈맨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간단하게 말하고 있는가? 간단하게 답을 얻을 있다.

사람은 과연 기대해도 좋은 사람인가이것은 믿을만한 상품인가? 새로 나온 발명품의 안전도는 어떤가? 그것은 팔릴 것인가? 실패작이 것인가?

의사, 변호사의 정직성이나 지식 정도 능력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 누가 가장 좋은 물리치료사, 선생, 코치, 수리공, 치과의사인가? 특정한 공직자의 의식 수준은 어느 정도 이상이어야 하는가? 현직자의 의식 수준은 어떠한가?

 

진실과 거짓을 즉각 분별할 있는 능력은 사회에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해 주는 가치 있는 것으로, 여러 분야에서 연구의 실제적인 적용을 시도했고, 결과 다음과 같은 것들을 확인할 있었다.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 정보/역정보, 간첩행위, 재판과 경찰 업무, 군대, 정치와 정부, 과학과 연구, 임상, 상업과 무역, 영성등

 

 

¡  상업과 무역

 

안되는 사업이나 사업을 진단할 있고재정적인 낭비나 시행 착오를 거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있다. 사업의 완전한 분석은, 사업과 관련된 사람들의 현재와 과거의 능력, 동기를 측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다음에는 성공을 위해서는 분야에서 얼마만큼의 의식 수준이 요구되는지를 알아낸다. 그런 다음에는 방침, 직원, 제품, 공급, 광고, 시장성, 고용 등의 절차를 같은 방법으로 도출해 있다.

 

목돈을 들이지 않고도 시장성을 있으며, 이로써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를 막을 있고 재정의 고갈을 피할 있다.

 

상업이나 무역 분야에서는 정치와는 달리, 어떤 것이 진실인지를 알기가 애매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는 모두가 암암리에 긍정하는 사실이 존재한다.

, 이익 추구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언사들이 반드시 개인적인 진실성과는 일치하지 않는 점이다. 과장된 손해 배상 청구, 허세, 선의의 거짓말 등에 쓰이는 편리한 양심은, 사업을 위해 양복과 넥타이를 번지르르하게 차려 입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일상업무 분야에서는 시험 방법을 다양하게 응용할 있다.

청구서의 정확성 여부도 중의 하나이다. 틀린 계산서는 검사자들의 팔에 약한 반응을 초래하며, 저질의 제품이나 솜씨에도 마찬가지의 반응이 나온다. 사기나 위조도 쉽사리 분별해 있다. 그러니 부도 수표인지 아닌지, 다이아몬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쉽게 알아 있다.

 

 

¡  영성(靈性)

 

방법은 영적인 면에도 깊은 영향을 끼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나는 몸이다." "나는 몸을 가지고 있다." 말의 진실성을 시험해 있다. 이런 식으로 시작하여 적절한 질문들을 계속함으로서 가슴 밑바닥에 있는 두려움을 청소할 있다.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진실이란 아무데서나 항상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발견은, 단순한 같지만 크게는 인류의 운명에 대한 깨달음의 열쇠이기도 하다.

 

모든 질문자들에게 일어나는 가장 최종적인 질문,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가장 거대한 의문,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잠재력의 근원에 대한 우리가 있는 한마디가 있다면, 잠재력은 그냥 '있을' 뿐이다. 진정한 잠재력은 의식 자체에서 발산된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현현된 것일 뿐이다.

 

사람이 동굴에 홀로 앉아 있어도 그의 생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삶을 돕기 위해 행해지는 행동과 결정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삶에 도움을 준다. 우리가 만드는 물결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들은 절대란 설명될 없다고 말하며,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야말로 실재에 대한 우주적이고 영원한 진술이다.

 

 

 

결론

 

 

운동역학의 시험으로 과거와 현재의 어느 문제이든 무제한 정보를 얻을 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누구에 대해서든지, 어디서나 어느 시대의 것이든, 모든 것을 있다는데 충격일 있다.

 

어느 개인의 고유한 생각과 동기가 시간을 건너뛰어 투명하게 관찰될 있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없다.

 

개개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우주에 지울 없는 흔적으로 남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혼란을 가져올 있다.

 

새로운 지식으로 인해 우리는 한동안 당황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인간 행동에 대한 과학적 재해석은 개인과 사회 문제들의 저변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노출하며, 바로 그와 같은 문제의 노출로 인해 해결책 또한 모색될 있다.

 

학설은 사실 너무 단순해서,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들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을 없는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학설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제 진실과 거짓 여부를, 실행할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선의와 악의를 정확하게 판별할 있는 방법을 손안에 쥐게 되었다. 지금껏 간과되어 왔던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감추어진 힘을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없었던 개인이나 사회 문제의 해답을 얻을 있는 방법을 쥐게 되었다. 거짓이 이상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않아도 좋게 것이다.

 

책은 개개인의 고통이나 시련, 실패 등을 원천적으로 되돌려, 인간 경험의 진수임에 분명한 기쁨의 차원으로 우리 각자의 의식 세계를 올려놓고 의식의 진화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책은 1965 1월부터 1994 6월까지의 연구결과이다.

 

자료의 많은 부분이 박사 과정의 연구논문을 쓰던 중에 발전된 것이다.

 

특별한 청중의 흥미에 따라 주제 자체를 희석됨이 없이 의식 구조의 분석을 총괄 권의 책으로 순수하게 전모를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저자의 이야기

 

 

그들은 그들의 '진아(Self)'로부터 해답을 얻고 잃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진아라고 해서 나의 그것과 다를 리는 없었다.

그들은 세상의 변화에 좌우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마음이 믿는 바에 따라 영향을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바로 이러한 깨달음을 위한 부단한 수련만이, 변화할 밖에 없는 존재의 부침에 저항할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단순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적어도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열망은 아주 강했다.

 

그런 다음엔 아무 예외 없이 누구라도 무엇이든지 용서하는 법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Ÿ 우리는 모든 것에 자비심을 품을 있어야 한다.

Ÿ 모든 욕망을 기꺼이 멈출 있어서 어느 순간이나 자신의 의지를 항복시킬 있어야 한다.

Ÿ 하나하나의 생각, 느낌, 욕망, 행위를 신에게 바쳐야 한다.

Ÿ 자신의 생각을 소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은 나아간다면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고 절반도 완성되기 전에 산산조각이 버릴 것이다.

Ÿ 생각이 무르익기 전까지도 신께 맡길 있어야 한다.

Ÿ 일상적인 활동을 계속해 나가면서도 언제나 정신을 집중하여 초점을 잃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Ÿ 명상하는 도중에도 산만해지는 순간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에고가 죽은 자리에는 진아가 들어섰다. 모든 것이 오듯이 드러나고 모든 것을 알고있는 진아가 자리를 차지했다. 하나는 모든 것이라는 인식이 뒤따라주었다. 하나는 온전히 모든 것이었고, 완전했다. 모든 신분을 뛰어넘어, 모든 성을 뛰어 넘어, 심지어는 인간성 자체를 뛰어넘어, 하나는 이제 이상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육체는 ' 라기보다는 그것' 된다. 안의 가구 같은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이 육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여 ''라고 표현하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지지만, 이러한 상태를 모르는 사람에게 말로 깨우쳐 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전통적인 종교적 가르침은 의미를 잃었고 역설적으로, 나는 불가론자가 되었다. 모든 존재를 정화시킨다고 내가 느꼈던 신성의 빛에 비하면, 전통적인 종교에서 거론되는 신성의 빛은 오히려 어둡게 느꼈다. 나는 종교를 잃은 대신 영성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우리는 전통적인 종교에 만족할 없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나라는 에고가 존재한다는 환상에서 온다. 자신이 우주이고, 완전한 존재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사실은 하나이며, 끝이 없는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 고통은 이상 자리가 없게 된다.

나는 모든 고통과 아픔은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에고에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 내면에 평화를 느낄 있게 됨에 따라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다.

 

 

애리조나주 세도나에서

첨단이론연구소

데이비드 R. 호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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